교회에 맡겨진 평화 만들기의 소명은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생명에 참여하기 위한, 과오를 피할 수 없는 인간적 투쟁을 반영하는 지속적인 개인적 공동체적 변모의 역동적 과정입니다. 성 니꼴라스 까바질라스는 평화 만들기에 관한 정교회의 시각을 경구적으로 요약합니다. “평화를 위해 무엇이든지 감행하셨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기술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일꾼’이라는 것보다 더 큰 특징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평화로운 백성이라 불렸습니다.” “평화의 기술자”로서 정교회는 기도와 전망과 행동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땅에서도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합니다. 평화와 정의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폭력과 불의와 억압을 줄이고자 하는 전망과 희망과 행동을 공유하는 살아있는 신앙과 신념의 사람들과 연합하게 합니다. 갈등과 불의와 억압의 상황에 대한 효과적인 개입을 위해서 교회는 갈등들을 기회로 변모시키는데 목표를 둔 성공적인 정치 경제적 정책과 실천에서뿐만 아니라 정치학과 경제학의 발전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장에서의 불의와 폭력의 근원적인 원인에 대해 말할 때, 정교회는 시장의 내적 합리성의 의 자율을 인정하고 경제 이론과 정책의 발전을 그 역동성을 더 잘 이해하는 이들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과에만 집착하는 경제 이론과 정책,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이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비판합니다. 교회의 비판은 권력과 자원의 보다 공평하고 공정한 분배의 기회들을 증대시키는 경제적 실천을 더욱 고무시킬 수정된 시장 논리의 형성에 기여합니다.

오늘날 15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불안정과 갈등 혹은 대규모적인 차원에서 조직화된 범죄적 폭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등의 원인들은 경제, 정치, 사회 안전망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지역과 종교와 민족 집단들에 미치는 정치적 배제와 불평등은 내전의 직접적인 위험과 결부됩니다. 반면 부자와 빈자 간의 불평등은 폭력의 직접적인 위험과 밀접하게 결부됩니다. 국가 안에서 그리고 국가 간의 빈부 격차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습니다. 실업은 점증하고, 점점 더 사람들을 가난, 영양실조, 허약한 건강 상태, 억압, 폭력, 불안, 공보 그리고 절망 속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거의 10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영양결핍에 시달리고 있고 이 숫자는 1분마다 68명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1초에 한 명 이상씩 늘어나는 비율입니다. 폭력에 대해 인간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모든 인간 존재를 하느님의 이콘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정교회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점증하는 불평등을 야기하는 경제 위기와 통화 위기를 무엇보다도 먼저 영적 위기 혹은 문화적 위기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부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이끄는 무제한적 개인주의, 그리고 소비주의의 결과입니다.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는 사람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끊어내고, 그렇게 해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그들의 삶 속에 반영하는 것을 막아 버립니다.

분리되기 전 교회의 탁월한 한 스승,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가난한 자의 변호자가 되지 않는 것은 “최악의 비인간성”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가난한 자의 변호자였던 그는 부자가 가난한 자의 소외를 정당화하며 제시하는 모든 주장들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무관심을 하나씩 전부 논박하고 책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특권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가난한 자와 동일시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동정심 혹은 역겨움을 일으키는 인간적 불행과 고통에 빠진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콘입니다. 균열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의 현존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존귀함입니다! 만약 가난한 이에게 빵을 주길 거부한다면 우리는 먹을 것을 바라는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배가 터지도록 먹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한 만큼도 먹지 못하셨습니다. 그때 당신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재물을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소비해 버린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에게 가난한 사람은 모든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가장 거룩한 요소의 전례적 형상, 즉 제단과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정교회는 물질적 부를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자비의 문화를 옹호합니다. 자선과 동정은 단지 물질적 부와 수단을 가진 사람들만 실천할 수 있는 덕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인간 존재들을 위해 지녀야 하는 공동체적 사랑을 증진시키는 덕들입니다. 부유하건 가난하건 간에 모든 인간 존재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자선심과 동정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 대 바실리오스는 가난한 사람에게 그가 가진 얼마 안 되는 최소한의 물질도 나누라고 권고합니다. 자선은 사람을 하느님께로 이끌어주고 모두에게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부와 그들의 인간적 잠재력의 개발을 가능케 해줍니다. 하지만 현재의 세상에서 물질적 부의 자발적 나눔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평화의 문화를 세우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가난의 근원적인 원인들을 없애고자 하는 세계적, 지역적 제도 개선과 새로운 경제적 실천들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자비 문화를, 가난의 구조적 원인과 반성적 협력 행동들을 통해 긴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다양한 차원들에 대한 사회 과학적 탐구의 성과들과 경험을 통하여 획득된 지식과 결합시킬 것을 요청합니다. 점점 더 파편화된 세상에서, 정교회는 모든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승인하고 옹호하면서 인간의 연대를 적극 장려합니다. 시장의 폭력성에 있어서, 비록 사람이 마음 속으로는 자비와 평화의 덕을 품고 있다 해도, 시장은 그 자신의 자율적인 논리와 경제적인 실천으로 작동합니다. 그것은 경제적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서 개인들이 아무 규제 없이 경쟁하는 경제적 관계가 최고선에 이를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에 대한 신념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그것은 정부의 개입이 없는 자유 시장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부의 사회적 분배에 있어서도 최선이라고 옹호합니다. 많은 경제학자들과 세계 개발 기구들이 경제적 세계화를 논쟁의 여지가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다른 대안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가 모든 국가의 번영과 공평한 발전에 기여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경제 정책들은 세계의 가난한 백성들의 즉각적인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계획도 없습니다. 국가 간, 그리고 국가 안에서의 세계적인 불평등은 더욱 확대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은행 부총재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경제문제와 사회 정치 문제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방식의 세계 경제화는 재점검되지 않는다면 가난을 더욱 악화시키고 폭력을 더욱 증가시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정교회는 경제적 세계화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할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세계 경제를 규제하는 복잡한 경제 정책과 실천을 강요하거나 혹은 거부할 의도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교 복음의 종말론적 전망에 입각하여, 정교회는 모든 정치 경제 이론과 실천은 폭력과 불의를 낳는 측면들을 극복하기 위해 비판받고 수정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시장 논리가 경제적 자본과 권력을 소유한 이들에게만 유익을 가져다주는 이윤의 극대화만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경제적 실천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의롭고도 지속가능한 발전을 보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교환이 삶의 풍요로 이끌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특별한 판단을 전제하지 않는 참된 자유 경제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들은 그 신앙으로 인해 하느님의 평화와 정의를 반영하는 경제적 실천들을 증진시킴에 있어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요청받습니다. 이 경제적 실천은 온 인류를 평화와 정의 안에서 연합시키는 자비의 문화를 증진시키는 사회적 삶의 요소들을 이 논리 안에 통합시킵니다. 모든 인간의 존엄과 권리에 대한 존중, 공평한 사회 경제적 관계, 경제적 정치적 결정 과정에의 폭넓은 참여, 부와 권력의 정의로운 공유 등이 이 문화의 불가결한 요소들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부와 권력의 불공평한 분배의 결과로 고통 받는 수천 수억의 사람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난과 불의를 뿌리 뽑기 위한 고귀한 분투에 기도와 사려 깊은 행동으로 참여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라는 것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