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경험이고 예배는 하느님 백성의 가장 근본적인 행위입니다. “기도 없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기도가 없는 곳에는 오직 광기와 공포만 있을 뿐입니다. 정교회의 영혼은 바로 이 기도의 선물 안에 있습니다.” (바실리 라조노프)

예배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정교 그리스도인은 육신이 되신 하느님 말씀에 강하게 결부된 달력에 따라 살아가고 시간을 구분합니다. 매년, 매달, 매주, 그리고 저녁과 함께 시작되는 매일의 순환 주기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또한 하느님의 말씀께서 육화하셨고 우리 가운데 사셨던 결정적이고 숭고한 순간들, 그분이 태어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순간들로 이뤄집니다. 우리의 구원이 토대로 삼고 있는 이 행위들과 사건들은 단번에 모두를 위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리듬과 흐름 안에서 그것들은 다시 기억되고 경축되고 새롭게 경험됩니다. 모든 전례 안에서 우리는 단 한번 죽으시고 지금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동일하신”(히브리서 13:8)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모든 전례 안에서 그분은 과거의 구원 사역과 그것의 성취를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십니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예배는 우리를 시간의 끝으로 인도합니다.(마태오 18:20) “아버지와 함께 높은 곳에 좌정해 계시는” 그분은 “또한 보이지 않게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신성한 리뚜르기아의 기도문)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 끝나는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마태오 28:20)

교회는 그 선포와 복음과 성사들을 통하여 그분의 피조세계와 연합하시도록 “피조세계의 주님”을 부릅니다. 새로운 세상은 이 세상의 지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앙의 신비 안에서 저절로 자라납니다.(1 고린토 1:19-21ㅡ 2:6-9) 일반적으로 예배 그리고 특별히 성사들은 우리를 미래의 세상 하느님 나라로 들어서게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의 구원하는 행위 안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은 우리를 만드신 그분과의 닮음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개조됩니다.

주님을 기억하며 하루를 지냅니다.

일출과 일몰, 매주, 매달, 매해의 주기적 반복 안에서, 우리가 공통되게 가지는 매일 매일의 시간 경험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과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전례적인 시간 안에 통합되었습니다. 낮과 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되는 시간은 새로운 의미, 새로운 장중함, 새로운 절박감을 얻습니다. 매일은 은총의 날이, 매년은 주님의 해가 될 가능성을 가집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곧 매일 매년이 하느님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하셨고 또 계속해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동시에 그분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모든 풍요함을 기쁨을 선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2 고린토 2:9) 적합하고도 결정적인 순간들(카이로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 주간, 달, 해라고 하는 네 개의 상관된 차원 위에서 움직이는 전례 주기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합체시켜주고, 그리하여 우리가 살고 행동하는 시간(크로노스)를 우리 구원의 결정적인 시간(카이로스)로 변모시켜줍니다. 매일은 우리의 현존 전체의 형상이 됩니다. 우리가 매일을 조직하고 사용하는 방법과 그 매일이 둘러싸고 있는 우리 삶의 우선성은 각 개인의 삶의 질을 알려주는 표시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매일은 영원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실존일 수 있고 또 그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인 오리게네스의 말처럼, “주님이신 하느님 말씀(Divine Logos)에 따라 언제나 말하고 일하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느님의 날 안에서 살아가고, 끊임없이 ‘주님의 날’들을 지킵니다.”

모든 자연 현상 중에서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해가 지고 뜨는 것보다 더 뚜렷하고 중심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빛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자연적 우연 그 이상의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은 언제나 빛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마 4:16) 그래서 일몰과 일출의 시간은 기도하기에, 죄와 부패와 죽음의 어둠을 흩으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공동체 예배 혹은 개인적인 묵상과 기도가 드려지는 매일 저녁과 아침, 신심 깊은 신자는 빛이신 그리스도의 상징적 표현으로 등잔을 밝히고 기쁨과 감사로 화사한 빛이시고 기쁘고 따뜻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매일 예식들

성사 이외에 정교회의 매일 예배는 주되게는 저녁 기도 예식인 만과와 아침 기도 예식인 조과로 구성됩니다. 이 두 예식은 정교회의 매일 예배에서 가장 길고 가장 잘 구성된 예식입니다. 이에 더하여 매일 예식은 네 번의 시과(1시과, 3시과, 6시과, 9시과), 석후과, 심야과를 포함합니다.

시과들은 고대에 이름 붙여진 하루의 시간 간격들, 1시(일출), 3시(오전 9시경), 6시(정오), 9시(오후 3시경)에 조응합니다. 이중 1시과는 실상 조과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보통 조과와 함께 드려집니다. 각 시과의 중심이 되는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에 더하여, 각 시과는 3편의 시편과 성가들 그리고 각 시과에 고유한 기도문들을 포함합니다. 각 시과는 특별한 주제들을 가지고, 때로는 그리스도의 사건과 구원의 역사의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춘 배경 주제들을 가집니다. 각 시과의 일반적인 주제를 보면, 1시과는 참된 빛의 오심을, 3시과는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6시과는 주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수난을, 9시과는 주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을 기념합니다.

석후과는 저녁 식사 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드리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세 가지 주제에 초점을 둡니다. 먼저 지나간 하루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밤 동안의 보호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낮 동안에 행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간구합니다. 심야과는 명칭이 말해주듯 한 밤중(자정)에 드리는 예식입니다. 기술의 발전과 노동과 수면 습관의 변화로 인해, 이 예식은 요즘 거의 수도원 공동체에서만 제한적으로 드려집니다. 성경에서 한 밤중은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깊은 밤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 중에는 우리 주님의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한 밤중에 주님의 재림 파루시아가 일어날 것이라고 암시합니다.(마태오 25:26, 1 테살로니카 5:24) 이 예식은 바로 이러한 주제들로 구성됩니다.

여덟 개의 매일 예식은 고정된 요소들은 ????매일 예식서????(Horologion)라 불리는 전례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루 동안 이렇게 자주 매일 예식을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구원의 유익한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전례적 신심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죄로부터 보호받게 해주고, 매일의 모든 활동과 노동을 복되고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히폴리투스는 자주 기도를 실천하는 신자들이 얻는 커다락 유익을 다음과 같은 말로 강조합니다.

“… 만약 그대가 이렇게 행동하고 이런 것들을 명심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도 이것들을 가르쳐 준다면, 그대는 항상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가지게 될 것이므로, 유혹을 받을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와 주간의 시작

정교회는 유대교로부터 시간을 측정하는 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관념을 물려받았습니다. 먼저 하루는 일몰에서 다음 일몰까지로 계산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녁은 하루의 시작을 표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전례적인 하루도 만과와 함께 시작합니다. 그러나 로마 비잔틴 관습의 영향을 받아서, 한 밤중(자정)부터 하루가 시작된다는 관념이 또한 전례 관습 안에 도입되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초기의 유대교적 관념이 지배적이고 대부분의 경우 교회의 전례 관습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교회의 전례 관습 안에 이 두 가지 관념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예는 바로 금식의 규범입니다. 보통의 날이든 대축일이든 금식일이든 모든 날들은 전례적으로 일몰 시간에 만과와 함께 시작합니다. 하지만 금식으로 지정된 날이나 혹은 신성한 리뚜르기아의 영성체를 준비할 때, 규범에 따르면 금식은 항상 자정 직전부터 시작합니다. 두 번째 관념은 7일로 구성된 주간 관념을 교회가 채택한 것과 관련됩니다. 교회가 이 주간 관념을 사용함을 통해서 한 달을 구분하는 이 방식은 마침내 모든 이방인 세계의 다른 방식들을 대체해 버렸습니다. 구약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 기초를 둔 유대교 관습에 따르면, 한 주간의 처음 여섯 날은 별다른 명칭 없이 순서로 나열되었지만, 마지막 날은 사바트(Sabbath), 즉 안식의 날이라 불렸습니다. 이어서 나중에 그리스 말로 여섯 번째 날도 특별한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사바트 직전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준비한다는 의미로 빠라스케비(준비일)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정교회의 전통에서 첫째 날을 제외하고 한 주간의 모든 날들은 이렇게 성경에 바탕을 둔 명칭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주간의 첫날을 교회는 ‘끼리아끼 이메라’라고 불렀는데, 이는 “주님의 날”(주일)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서방에서는 옛날 이교도 전통들이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한 주간의 날들은 해, 달, 그 밖의 행성들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고대 이교 신화에서 이러한 행성들은 신들의 이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신 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유대교의 한 주간의 첫 번째 날이었고 계속해서 그러해 왔습니다. 구약의 백성에게 첫째 날은 하느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갈라내신 창조의 첫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신약의 백성에게 첫째 날은 이것을 포함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더 가집니다. 첫째 날은 빈 무덤이 처음으로 발견된 날이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분을 따르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신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첫째 날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이고,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로 인해 개신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일이었던 것입니다. 1세기 말엽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 특별한 날에 구별되는 그리스도교적 명칭, 주님의 날(끼리아끼 이메라)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묵시록 1:10)

주님의 날(일요일)은 그리스도교의 제도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위에 세워진 그리스도교의 축제일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내신 날”(시편 117:24)입니다. 그것은 기쁨의 날이요, 거룩한 집회일입니다. 그래서 이날은 누구도 슬픔과 참회 속에서 금식하거나 무릎 꿇어서는 안되는 날입니다. 주후 321년, 첫 번째 그리스도교 황제였던 성 콘스탄티노스는 이날을 휴일로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 오래전부터도 그리스도인들이 이 날을 특별히 엄숙하게, 영적인 일에 봉헌된 거룩한 날로 지켜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휴일인 주님의 날은 게으름과 나태함의 날로 오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이 날은 언제나 교회의 공동체 예배에 참여하는 날, 그리스도교적인 친교의 날, 사랑과 자선의 행위를 통해 하느님을 섬기는 날, 개인적인 침묵과 묵상의 날, 우리 안에 백성 안에 우리의 삶을 둘러싼 온 세상 안에 충만한 하느님 현존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날에 행해지는 교회의 주된 활동은 신성한 리뚜르기아를 거행하기 위해 모이는 일입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보내는 한 주간의 삶의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빠스카의 신비가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영속되고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성찬예배가 거행되지 않는 일요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 행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부활하시고 통치하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제공되는 말씀과 성사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고 나눠주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삶으로 경험되는 새 생명의 신비와 기적은 끊임없이 드러나고 세워집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가 우리를 “마지막 날”(에스카따)에 들어서게 해주기 때문에, 주님의 날은 또한 “제 8요일”로 알려져 왔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영광이 그날을 밝혀주고 그날의 등불이기 때문에, 그 날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묵시록 21:23) “제8요일”은 마지막 때,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시작된 새로운 창조가 충만하게 성취되고 완성되는 날이고, 보편적 부활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이 개시되는 날입니다.

주간의 요일마다 강조되는 주제

초기의 교회가 한 주간의 다른 요일들을 특별한 주제로 구별해 놓았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토요일(사바트)는 창조이야기의 기억과 관련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 2:3) 교회의 전례 전통 안에서 토요일은 언제나 축제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만물을 무에서 존재로 불러내신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되새기게 해주고,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영원한 사바트(쉼), 다시 말해 하느님의 창조적인 생명에 참여해야 함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께서 육신으로 무덤에 묻히신 것을 기념하는 성 대 토요일을 제외한다면 토요일에 결코 금식하지 않습니다.

사도 시대부터 교회는 수요일과 금요일을 금식일로 지켜왔습니다. 초기부터 수요일 금식은 유다가 그리스도를 배신한 것과 관련되었습니다. 반면 금요일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과 관련되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이 세상의 끔찍한 어둠과 악, 그리고 인간의 죄와 배교의 비극적이고도 두려운 분위기를 드러내줍니다. 이 두 날은 이 세상의 날입니다. 이 세상은 어둠 속에 누워있고, 그래서 기도와 금식을 통해(마르코 9:29)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날은 특별히 깨어있을 것을 요청받습니다. 매주 이렇게 반복하여 금식하고 깨어있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아직 충만하게 임하지 않았음을 기억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 두 날은 준비와 선취의 날이요, 참회와 고대의 날입니다. 모든 금식이 해제되는 몇몇 기간(예를 들어 부활대축일 후의 일주간인 빛의 주간)을 제외하고, 이 두 날은 근본적으로 언제나 참회의 날입니다. 초기의 저자들은 이 두 날 교회는 다 함께 모여 공동으로 기도하고 성직자가 읽어주는 성경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때로는 감사의 성찬 예배를 드렸다고 설명해줍니다. 대사순절 기간에는 이런 활동들에 더하여 신자들의 더욱 충만한 양육을 위해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가 결합되었습니다.

전례가 발전하고 확장되어 가면서, 한 주간의 다른 날들도 각각 특별히 강조되는 주제들을 부여받게 됩니다. 점차적으로 동방 정교회는 주간의 전례 주기를 완성해 갔습니다. 이 주간주기를 통해서 간결하면서도 탁월한 방식으로 연중 축일 주기 전체를 요약했던 것입니다. 한 주간의 축일 주기는 하느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기념과 함께 시작합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주님의 날은 매주 반복되는 빠스카(부활절)이고,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월요일(그리스어로 데프테라 이메라, 즉 둘째 날이라 불립니다.)은 천사들을 기념합니다. 화요일(트리티 이메라, 셋째 날)에 교회는 세례자 성 요한과 그를 대표로 하여 모든 예언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목요일(펨프티 이메라, 다섯째 날)은 거룩한 사도들과, 그리고 사도들의 계승자인 위대한 주교들과 교회의 모든 스승들의 모범이신 성 니콜라스를 기념합니다. 토요일에 교회는 순교자들, 금욕가들 그리고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잠드신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수요일과 금요일, 교회는 십자가의 신비와 테오토코스이신 평생 동정녀 마리아의 신비를 결합하여 강조하고 기념합니다. 이 두 날은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먼저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내어주신”(요한 3:16) 하느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또 “보소서, 당신의 여종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내게 이뤄지게 하소서”(루카 1:38, 마르코 14:36, 필리보 2:8)라고 대답했던 동정녀 마리아를 기념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하느님의 뜻과 목적을 자유롭고 겸손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협력과 응답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가능케 한다는 말입니다.

주간 축일 주기는 ????8조 예식서????(옥또이꼬스 혹은 파라클리티코스)라 불리는 전례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8조예식서????는 8주 단위로 반복되는 주기로 구성됩니다. 각 주간마다 하나의 음조가 결합되어 8주간 동안 총 8음조의 성가들이 주간 각 요일에 할애된 주제들을 표현합니다. 이 8주간의 반복되는 주기는 부활대축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 시작되어 다음 해 대사순절 마지막 날에 종결됩니다. 8조 각각은 주일을 시작으로 하여 한 주간에 드려지는 매일 매일의 각종 예식과 예배의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합니다. ????8조 예식서????의 본문들은, 전례 규칙을 정해놓은 ????규칙서(띠삐꼰)????에 따라 주어진 날에 드려야할 예배들을 구성하기 위해, 다른 전례 예식서들과 결합됩니다.

연중 전례 주기

일반달력에 녹아들어간 연중 전레 주기는 거룩한 표징들의 단일체가 됩니다.

“각각의 전례적 축일들은 상징이 되어 한 사건을 새롭게 하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현재화합니다. 축일은 과거로부터 사건을 취해서 현재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 연중 전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는 특별한 수단들입니다.”(레브 질레)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기억이요 수단으로서, 연중 전례 주기는 은총의 원천이 됩니다. 이어지는 축일과 금식을 통해서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 주님과 그분의 어머니와 세례자 성 요한과 거룩성에 도달한 모든 남녀, 어린이의 삶 속의 사건들을 기념합니다. 각 축일은 신적인 질서의 어떤 차원과 의미들을 초점을 둡니다. 테오토코스의 축일을 시작으로 하여 가장 최근에 교회가 성인으로 공포한 성인들의 축일에 이르기까지 성인들의 축일은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특별한 은총을 경축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거룩성은 단지 그리스도의 거룩성의 한 측면, 하나의 광선이기 때문입니다.”(레브 질레) 축일 달력은 계속되어온 발전의 결과물입니다. 고대 그리스도교에서 시작되어 그것은 항상 “전진 과정” 중에 있습니다. 각 시대는 그것에 그 시대의 의미있는 교회적 사건들, 마음의 순결함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었고 또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풍부하게 흘러넘치게 해준 통로였던 그 시대의 순교자들과 신앙의 증인들을 추가합니다.

정교회의 연중 전례 주기는 4세기 초 성 콘스탄티노스에 의해 도입된 고대 관습에 따라 9월에 시작됩니다. 연중 전례 주기의 축일과 금식일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다양한 양상을 띠며 전개되는데, 보통 크게 두 범주로 구분됩니다. “비고정 축일”과 “고정 축일”이 그것입니다. 비고정 축일들은 날짜가 해마다 변하는 빠스카 부활대축일과 관련됩니다. 하지만 고정축일들은 매년 날짜가 같고, 그 예식 본문들은 12권으로 된 ????월별 예식서????(미네온)에 집성되어 있습니다. 총 19주의 기간을 포함하는 비고정축일의 예식 본문은 ????사순절 예식서????(뜨리오디온)과 ????오순절 예식서????(뻰디꼬스따리온)라는 두 개의 두꺼운 예식서에 담겨 있습니다. ????사순절 예식서????의 그리스어 제목인 ‘뜨리오디온’은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까논이 단지 세 개의 오디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말입니다. 그것은 크게 세 기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사순절을 준비하는 3주, 둘째는 대사순절의 6주, 그리고 셋째는 성대주간입니다. ????오순절 예식서????는 부활대축일 조과부터 모든 성인들의 축일인 오순절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주일까지의 기간에 드려지는 예식 본문들이 포함됩니다. 거룩한 기억에 대한 다양한 경축과 예식을 통해 비고정축일과 고정축일 주기는 풍요롭고도 다양한 영적 환경을 조성하고 삶을 성화합니다.

보편적 중요성을 갖든 아니면 지역적인 중요성을 갖든, 각각의 축일은 언제나 신성한 리뚜르기아의 거행으로 경축됩니다. 왜냐하면 감사의 성찬 예배 거행이야말로 교회의 영속적인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그 날을 참된 축제일, 부활의 기쁨과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날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성대주간

초대 교회에서는 부활대축일 경축에 앞에 슬픔과 엄격한 금식으로 보내는 이틀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만찬 사건을 기억하며 성대 목요일 저녁 감사의 성찬 예배를 거행한 후 신자들은 부활대축일 철야예배 때까지 엄격한 금식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은 점차적으로 부활대축일에 앞서는 일주간 전체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주간을 정교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하고 거룩한 주간”(성대주간)이라는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근본적이고 거룩한 사건이 기념되고 경축되는 순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대주간의 첫 3일은 우리 주님의 수난 직전에 있었던 사건들에 뿌리를 둡니다. 각각의 날들은 구별되는 자신만의 특징을 가지면서도, 이 3일 모두는 슬픔, 참회, 깨어있음 그리고 심판을 공통된 주제로 가집니다. 이 날들은 파루시아, 즉 주님의 다시 오심에 초점을 둡니다. 그래서 한 밤중에 오실 “신랑”(마태오 25:6)의 날들입니다. 이제 곧 교회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안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이 날들은 참회에 대한 가장 긴급하고 절대적인 요청을 제안합니다.

성대 목요일이 되면, 전례는 이층방과 게쎄마니 동산에 초점을 둡니다. 이층 방에 차려진 식탁 모임에서 주님은 겸손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주셨고, 이어서 “우리가 하느님 자신을 받아 모시고, 하느님께서는 가장 완전한 연합 안에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는”(성 니콜라스 까바질라스) 가장 위대한 성사인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를 제정하셨습니다. 같은 날 모든 독립 정교회들과 세계 총대주교청은 고대 교회의 세례 관습을 계승하여 성유를 축성합니다.

성대 금요일과 성대 토요일은 우리의 주의를 그리스도의 재판과 십자가 처형, 죽음과 묻히심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고난 받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겸손과 조우합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참된 탄생이 됩니다. 그래서 이 날들은 동시에 깊은 암흑과 깨어 기다림의 날들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조물주께서는 죽음을 생명으로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와서, 무덤에 누워계신 우리의 생명, 죽어 무덤에 누워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분을 봅시다.”(성대 토요일 성가)

라자로의 토요일과 성지주일(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축일)은 성대주간으로 들어가는 직전의 기쁜 서막입니다. 이날들은 부활의 전조이고,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삶 속으로 쇄도합니다. 라자로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은 성대주간의 사건들과 신비를 요약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나타나시고, 왕으로 선포되고 인정받으십니다.

대사순절과 부활주간

4세기에 성대주간의 엄숙함과 빛의 주간의 축제성(부활대축일 다음의 일주간)이 정교하게 발전되었습니다. 빠스카 부활대축일을 위한 준비 기간은 점차 확장되었고, 부활을 경축하는 기쁨의 주간 또한 늘어났습니다. 대사순절은 주로 부활절 철야예배 때 새로운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와 다시 화해시키던 고대 교회의 관습의 결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이전의 주간들은 세례 예비자의 훈련과 교육, 그리고 참회자들의 준비에 바쳐졌습니다. 금식을 포함하는 이 집중 준비 기간은 성대주간 시작 40일전부터 개시되었습니다. 특별히 40일인 이유는 모세와 예언자 엘리아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께서도 40일 동안 금식했던 성경의 이야기들에서 비롯되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대사순절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에 가져오는 매우 탁월한 영적 유익으로 인해, 세례 예비자뿐만 아니라 세례 신자 모두가 다같이 지켜야 하는 보편적인 제도로 정착되었습니다. 이렇듯 “대사순절의 첫 번째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의존해 있는 존재임을 의식하게 해주는 것입니다.”(칼리스토스 웨어 주교) 그것은 일련의 특별한 규칙들의 준수, 영감어린 예식들, 감동적인 참회 예식, 심오한 성가체계와 선택된 성경 구절들과 교부들의 글들에 대한 묵상 등 그리스도교적 삶의 다양한 차원들을 제시합니다. 대사순절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삶의 심장부로 들어와 창조적으로 개입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시연해줍니다. 대사순절은 능수능란하게 참회의 힘과 가치, 삶에 대한 정교회적 관점의 생동성과 생활력과 진리를 확증해주는 영적 잠재력에 대한 역동적 교훈들을 능수능란하게 직조합니다.

빠스카 : 축제 중의 축제

대사순절의 엄숙함을 따라가면서 정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요 절대적인 사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부활시기의 도취시키는 기쁨 안에 들어섭니다. 처음부터 교회에는 십자가로부터 빈 무덤에 이르는, 성 금요일에서 부활의 날에 이르는, 거룩한 역사의 결정적이고 중차대한 “3일”에 대한 연례적인 기념 예식이 있었습니다. 빠스카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경배되고 가장 중요한 교회의 축제일입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의 날인 성 금요일과 성 토요일은 항상 깊은 슬픔과 엄격한 금식의 날이었습니다. 반면 부활의 날은 언제나 심오한 기쁨의 날, 축제 중의 축제일이었습니다.

빠스카의 원형은 선택받은 백성이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일인 유대인의 유월절입니다. 주님은 전통적으로 주후 33년이라고 계산되어 왔던 해 유월절 전날 십자가에 달리셨고 묻히셨다가 유월절 다음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그해 유월절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묘사에 의하면 십자가형은 금요일에 행해졌고, 부활은 일요일 새벽 일찍 일어났습니다.

정교회에서 빠스카는 거룩한 역사 안에 일어났던 유일무이한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기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구약성경의 유월절처럼, 빠스카는 해방의 축제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다르고 또 유일한 본질을 가진 해방이며, 구약의 해방 사건은 단지 그것의 예형일 뿐입니다. 빠스카는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해방,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사탄과 죽음의 패퇴, 그들의 사악한 지배로부터의 온 인류의 해방과 자유를 드높입니다. 빠스카는 온 인류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 죄악의 세상에서 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신 우리의 참된 유월절 그리스도의 축제입니다. 빠스카는 완전한 기쁨과 희망과 갱신의 축제입니다. 그것은 영원과 충만의 선물이고 약속입니다. 빠스카를 통해, 죄와 고통과 죽음은 제거되었고 패배당합니다. 빠스카는 우주적 구원의 축제입니다.

정교회 신자들은 세례 성사를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결합됨을 통해 구원을 얻습니다. 이렇게 초기 교회에서 빠스카는, 구원을 가져오는 세례성사와 견진 성사와 감사의 성만찬 성사가 거행될 최적의 시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후에 다른 대축일로, 특별히 오순절 성령강림대축일, 신현축일, 주님의 탄생 대축일로 확장되었습니다. 유아세례가 일반화된 후세에 와서 그리스도교 입문 예식은 보통 매주 반복되는 교회의 부활축제일인 일요일 어느 때나 거행되게 되었습니다. 몇몇 현대의 정교회 신학자들은 더 오래된 세례 관습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몇몇 연중 대축일 신성한 리뚜르기아와 공동체 예배 중에 세례를 거행하는 것으로 제한할 것을 제안합니다.

열두 대축일

정교회 축일 달력은 우리 주님과 테오또꼬스 성모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조명해주고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과 중요한 신학적 사상들을 부각시키는 다른 열 두 대축일을 포함합니다. 9월을 첫달로 삼는 교회력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모님(테오또꼬스)의 탄생 축일 : 9월 8일
  2.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현양 축일 : 9월 14일
  3. 성모님의 성전 입당 축일 : 11월 21일
  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축일 : 12월 25일
  5. 그리스도의 신현 축일 : 1월 6일
  6. 그리스도의 성전 입당 축일 : 2월 2일
  7. 성모 희보 축일 : 3월 25일
  8. 우리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축일(성지주일) : 부활대축일 전 주일
  9. 우리 주님의 승천 축일 : 부활대축일 후 40일째 되는 날
  10. 오순절 성령 강림 축일 : 부활대축일 후 50일째 되는 날
  11. 우리 주님의 변모 축일 : 8월 6일
  12. 성모 안식 축일 : 8월 15일

이 대축일들에 더하여 몇 개의 축일이 추가됩니다.

우리 주님의 할례 축일 : 1월 1일

성령 축일 : 오순절 성령 강림 축일 다음 날

라자로의 부활 토요일

대부분의 경우, 대축일 이콘들은 성상벽 위쪽에, 임금의 문 위에 장식되는 주님의 마지막 만찬 이콘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배치 장식됩니다. 이 대축일 중에서도, 요르단 강에서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 삼위 하느님께서 공현하심을 경축하는 그리스도의 신현 축일은 그리스도교 축일 달력에서 빠스카 부활대축일과 오순절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으로 오래된 축일입니다. 정교회는 이 대축일을 특별히 대성수식의 날로 특별히 장엄하게 경축합니다.

축일력은 비록 거룩한 역사의 특별한 순간들에 집중하고 있지만, 결코 하느님의 구원 사역의 진리 전체를 포괄합니다. 모든 전례 예식은 우리의 구원에 특별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축일들은 우리 안에 그리고 그분의 온 백성 안에 계시는 하느님 현존의 진리로 우리의 모든 관심과 주의를 이끌어갑니다.

성인들의 축일

고정축일 달력은 성인들의 생애 혹은 정교회의 삶에서 기억되어야 할 사건들을 기념하는 다양하고도 중요한 축일들로 가득합니다. 연중 매일 교회는 모범적인 신앙과 인내로 자신의 삶을 우리 주님께 바친 하나 이상의 거룩한 사람을 기억하고 공경합니다. 축일 달력이 몇 번의 축제일을 부여하는 테오또꼬스와 세례자 성 요한 이외에도 정교회는 천사들, 순교자들, 사도들, 예언자들, 고백자들, 동정녀들, 금욕가들, 주교와 사제들을 공경합니다. 사도들과 사도대등자들의 축일들, 위대한 순교자들과 교회의 위대한 박사들과 교사들의 축일들은 좀더 보편적으로 지켜집니다.

한 성인을 공경하기 위해 축일이 정해진 첫 번째 기록의 예는 2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초의 성인 축일 기념은 주로 지역의 순교자들과 주교들에 대한 기억과 기념이었습니다. 축일은 보통 그들의 무덤에서 기념되었고, 이러한 관습으로부터 거룩한 제단 축성시 제단에 성인들의 성해를 모셔 보관해두는 관습이 비롯되었습니다.

성인들은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의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그들은 천상의 삶의 첫 열매들이고,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선구자들입니다. 이 축일들은 모든 신자들에게 제자도의 참된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 단지 나를 하느님께 바쳐진 희생제물로 삼아주소서. …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안티오키아의 성 이그나티오스) 고대 전례 관습에 따라서 정교인인 부모들은 생후 8일째 되는 날 새로 태어난 자녀들에게 이름을 붙여줍니다. 교회와의 연합 속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또 세례 성사와 함께 개시되는 영적 투쟁의 장에 들어선다는 의미로, 전통적으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은 성인들의 목록에서 선택됩니다.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금식에 대해 살펴봅시다. 연중 전례력은 길이가 다른 일련의 중요한 금식 기간들을 포함합니다.

금식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합니다. 다만 부활대축일 이후 일주간인 빛의 주간과 부활대축일 기간 종례일, 오순절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일주간, 주님의 탄생 대축일과 신현축일 사이의 기간, 그리고 뜨리오디온의 첫 번째 주간 다시 말해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주일 이후 일주간은 금식이 해제됩니다. 또 주님의 대축일 혹은 테오또꼬스의 대축일이 수요일이나 금요일과 겹칠 때, 일반적으로 금식은 해제됩니다.
  2. 주님의 탄생 대축일 전날(12월 24일)과 신현 대축일 전날(1월 5일)에 금식합니다.
  3. 십자가 현양 축일(9월 14일)과 세례자 성 요한의 참수 기념일(8월 29일)에 금식합니다. 이 두 금식일이 토요일 혹은 일요일과 겹칠 때는 금식이 해제되지 않지만 완화됩니다.
  4. 네 번의 금식 기간

금식 기간

  1. 40일 동안 지속되는 대사순절 금식 기간. 수도원 전통에 따라 또한 대사순절 시작 전의 한 주간 동안에도 부분적인 금식을 행합니다.
  2. 성대주간 금식 기간. 라자로의 부활 토요일과 성지 주일(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축일)에는 완화된 금식을 지키고, 성대 월요일부터 부활대축일 철야예배 때까지는 엄격한 금식을 행합니다.
  3. 사도 금식 기간. 모든 성인들의 주일 다음 월요일에 시작되어 성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의 축일(6월 29일) 전날인 6월 28일에 끝납니다. 이 금식 기간은 부활대축일 날짜에 따라 그 길이가 변화됩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이 금식은 그리 철저하게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4. 성모 안식 대축일 금식 기간. 8월 1일부터 성모안식축일(8월 15일) 전날까지.
  5. 대림절 금식 기간. 11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보통 금식기간에는 결혼 예식이 금지되지만, 특별히 대림절 기간에는 허용됩니다.

금식은 언제나 기도와 자선과 결합됩니다. 일상적 삶 속에서 이 세 가지를 통합시킬 때, 정교 그리스도인들은 보초병처럼 깨어있게 되고, 자신을 넘어서서 하느님께로 끊임없이 고양되는 영원의 사람을 선취합니다. 몸과 영혼, 전체의 인간이 금식의 행위에 참여합니다. 몸이 영적인 수련과 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가 아니라 절제를 통한 인내와 영적 집중의 노력을 통해서입니다.

보통 금식 규칙은 매일의 끼니 수와 허용된 음식의 종류를 정해집니다. 금식의 강도에 따라 다음과 같은 금식의 유형들이 존재합니다.

  1. 육식의 금지
  2. 1을 비롯하여 동물에게서 취하는 모든 음식, 계란, 우유, 버터, 치즈 등의 유가공 제품의 금지
  3. 1과 2을 비롯하여 생선 금지
  4. 1과 2와 3을 비롯하여 기름과 포도주 금지

적게 먹는 것 또한 금식의 강도를 결정합니다. 가장 엄격한 금식은 ‘마른 식사’(xerophagia)로 물, 빵, 쥬스, 꿀, 견과류 등의 섭취로 제한됩니다. 보다 덜 엄격한 형태는 과일과 삶은 야채를 허용합니다.

성사에 참여하는 것 또한 기도입니다. 정교회에서 기도와 엄숙한 축일 예배에 참여하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권능과 영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사건입니다. 다마스커스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기도 안에서 우리 영혼에 내려오시고, 영은 하느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하느님과의 친밀하고도 놀라운 친교와 참여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명령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초대장을 주기 위해 오십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묵시록 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