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 특징은 교회의 전례 혹은 예배로 풍성하고 비옥하게 형성됩니다. 성경 구절과 다양한 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들로 가득 찬 전례 본문들은 교회의 참되고 살아있는 전통을 하나의 영광송의 형태로 제시합니다. 전례에서 정교인들은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와 지속적으로 교감합니다. 예배는 신실한 기도의 신학, 성경의 백성이 드리는 살아있는 찬양의 제사, 영적인 세계의 관상, 성령과의 약혼, 그리고 장차 올 것들에 대한 미리 맛봄이 됩니다. 부활을 기념하면서 또한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정신을 가진 정교회의 전례는, 그 안에서 역사 속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권능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여 보여줌으로써, 이미 임하였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우리의 구원의 약속으로서 기쁘게 경축합니다.

하느님의 생명의 유입

교회에서 이미 경험된 왕국의 권능은 믿음으로 봉헌된 신성한 신비들 혹은 성사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창문을 통하듯이 이들 성사들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어둔 세상에 들어오셔서 죄와 타락에 죽음을 선고하고 영원한 불멸의 생명을 들여오십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변화나 혼동 없이 성사를 통해 현시대에 유입되고 섞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사를 통해 당신의 창조되지 않은 신성한 에너지로 사람들의 생명을 정화시키고 축성하며 또한 깨끗히 하고 환하게 밝히며 어루만지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사 안에서 모든 이들과 동시대인이 되십니다. 모든 사람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지금 성사들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의 구원하시는 권능이 성사를 통해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현존하며 역사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확장이기에, 성사들은 능력이며, 교회는 이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성화합니다.”

다가올 삶을 위한 준비

성사들은 신자들이 다가올 삶을 준비토록 할 뿐만이 아니라, 그 삶을 지금 여기에 실현시킵니다. 우리는 성사들을 통해 다가올 것들을 미리 음미하고 보게 됩니다. 성사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전달해주시는 하느님의 변화시키는 능력, 즉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치료하시고 “죽음의 싹을 제거하시는” 그분의 능력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성사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실재와 마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람됨의 진정한 의미를 온전히 자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면서 또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왜곡시키고 침범하는 힘, 즉 악의 권능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동맹한 우리는 죄와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공유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권능은 우리 안에 있는 악을 정복하시고, 우리를 다시 하느님의 자녀와 왕국의 상속자로 만듭니다.

“신비Mystery”라는 말의 의미

각각의 성사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 뿌리를 둡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근원적인 신비이시고,(요한 1:1~18) 또한 모든 신비들의 참된 집전자이십니다. 정교회는 성화시키는 신적 은총을 드러내고 전달해주는 신성하게 제정된 예식들을 표현함에 있어, 성사라고 번역되는 sacrament대신에 신비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mysterion을 더 즐겨 사용합니다. mysterion 이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숨겨진 어떤 것, 불가해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이 단어를 신앙의 교리와 본질적 신념에 적용하여 왔고 또한 성경에 수차례 표현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세상의 구원과 관련된 하느님의 숨겨진 비밀스러운 의지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비밀스러운 구원 의지는 이제 육화하신 말씀(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 신비를 선포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때문에, 교회가 이를 수행하고 있는 본질적 행위 또한 신비로 불립니다. 이런 모든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구원의 위대한 신비에 참여하는 자 그리고 수익을 얻는 자로 만들어집니다.”(알렉산더 슈메만)

가시적인 수단들을 통한 은총의 전이

거룩한 성사들은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동시에 조화롭습니다. 구원하고 성화하는 은총은 가시적인 수단을 통해 전이됩니다. “그리스도의 신-인 본성은 그분의 교회와 교회가 가진 은총의 수단들 모두로 확장됩니다.”(D. Constantelos) 이렇게 물질적인 형태로 영적인 실재를 구현하는 것은 육화의 신비와 물질의 궁극적 구원에 근거합니다. 이것은 신-인적 제도로서의,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 현존의 끊임없는 신비로서의, 교회의 본성과 일맥상통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기본적인 “선함”을 확언하며, 인간의 영육적인 본성을 자각케 합니다.

각 성사에 사용되는 성호와 몸짓과 물질적인 요소는 우리 경험적 현실과 연결되는 살아있는 상징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성령의 운반도구가 되고, 각각 신성한 은총의 신비스러운 권능을 깊고 충분히 표현하기에 적합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음식인 빵과 포도주는 일단 축성되면 불멸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됩니다.)

비록 외적인 표현으로는 물질적이지만 성사들은 단순한 상징적 의식이 아닙니다. 성사의 외적인 표식은 이들 표식 자체가 아니라 이 속에 내재한 성령의 현존으로 인해 은총을 실재적으로 운반합니다. 운반된 은총은 전혀 모호하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사람들을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 안에서 재창조하고 완전케 합니다.

거룩한 성사들 안에 신적 에너지가 진정으로 현존하는 것에 대해 다마스코스의 성 요한은 아래와 같이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느냐고 묻는다면, 성령에 의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변화의 방법은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성상 빵과 포도주와 물은 먹고 마심을 통해서 그것들을 먹고 마시는 사람의 살과 피로 변화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전과는 다른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제단 위의 빵과 포도주와 물은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와 성령의 현존을 통해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합니다. 이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똑같은 것입니다.”

신성하게 제정된 성사

거룩한 성사들의 효력은 성직자의 개인적 신앙과 도덕성에 기반하는 것도, 신자들의 선한 의지와 신앙 혹은 그들의 풍습에 기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권능에 기반하는 것입니다. 성사들은 그 권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지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사들은 인간의 단순한 발명품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느님께서 명하신 제도들입니다. 이 제도들을 통해서 하느님은,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그분의 교회 안에서 그리고 또 그 교회를 통해서, 만물과 모든 관계들을 그것들의 참된 의미와 목적과 운명으로 회복하시고, 자유롭게 그 아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적인 생명과 사랑을 전해주심으로써, 그분의 불가해한 지혜와 형언할 수 없는 영광과 사랑으로 세상을 변모시키십니다.

인간의 응답

구원은 사람의 협력synergy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인간적인 요소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게 하는 것, 인간이 하느님과 연합하는 것은 비록 동등하지는 않지만 똑같이 필수적인 두 가지 힘의 협력을 요청합니다. 이 두 힘은 바로 바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의 의지입니다.”(Lev Gillet) 거룩한 성사들은 마법적이거나 기계적인 장치가 아닙니다. 뿌려진 땅에 따라 씨앗이 다르게 자라듯이, 성사적 삶의 온전한 효과는 참여자의 영적인 앎, 신앙, 헌신에 따라 혹은 더 많은 혹은 더 적게 드러냅니다. 만약 성령에 반대하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지만 않는다면, 어느 누구라도 아무런 은총도 없이 버림받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양은 모든 것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사들은 사람의 가장 깊고 가장 근본적인 경험을 끊임없이 감싸고 부여잡고 변화시킵니다. 매우 인적이고 동시에 공동체적인 거룩한 성사들은 “올바름과 거룩함으로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 입는”(에페소 4:24) 사람의 영혼을 끊임없이 그리고 동시에 새롭게 합니다. 성사들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사역을 감당케 하고,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해줍니다.(에페소 4:12~13)

각각의 성사가 성령의 사역을 드러내는 외형상의 표식이 있듯이, 각각의 그리스도인 삶도 거룩한 성사의 권능을 공유함으로써, 그 자체로 성사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고 또 인간의 의지가 도달하는 만큼, 정신은 비추임을 받고 마음은 힘을 얻고 순수해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성령 안에 살고 걷습니다. 또한 성령은 그들 안에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갈라디아 5:22~23)라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사의 개수

최근 몇 세기 동안 정교회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혈성사, 고백성사, 신품성사, 결혼성사와 성유성사 이렇게 일곱 개의 신비성사들을 인정해 왔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거룩한 성사의 개수를 특정하지 않습니다만, 사도시대 교회에서부터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해 사람들을 받아들였고, 적어도 매주 주님의 날에는 성체성혈성사가 행해졌습니다. 또한 회개를 통해 참회자를 다시 받아들였고, 교회의 봉직자를 선택하고 서품했으며,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축성했고, 그리스도의 치유 은사를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에게로 확장시켰습니다. 비록 성경과 초기 교부들과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명확하고 체계적인 증언을 찾을 수는 없지만, 초대교회에서부터 이런 행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성사들은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과 행동에 근거를 두고 있고,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의 구원 사역을 연장하고 확장하는 행위입니다. 이들 성사 중에서 세례성사와 성체성혈성사는 특별한 위치에 차지합니다. 정교회 신학은 성사들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한편으로 성사들을 교회의 다른 많은 축복, 축성, 기념 예식들과 구분 짓거나 떼어내지 않으려 합니다. “성사라는 용어를 넓은 의미로 보든 좁은 의미로 보든, 여기에는 고정된 구분이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삶을 하나의 통일된 신비로서, 혹은 하나의 위대한 성사로 여겨야만 합니다. 다만 그 삶의 다양한 측면들이 매우 다양한 성사적 행위들로 표현될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일생에 단 한번 행해지고, 다른 어떤 것은 일상적으로 행해집니다.”(Kallistos Ware)

성사의 효력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되는 교회는 거룩한 성사의 집전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사는 두 가지 기본적인 조건이 지켜질 때 실행되고 효력이 발생합니다. 첫째 성사의 집전자인 주교나 사제는 교회법에 따라 서품되고, 교회의 합법적인 질서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둘째, 그들은 교회가 정한 예식들을 거행하도록 서품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마법적”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예식들이 이 구원의 행위들과 관련된 교회의 신앙과 정신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예식에는 기도, 간청, 성경봉독, 성가, 몸짓, 전례 행위가 포함됩니다. 신약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고, 살아있는 역동적 신앙 공동체(교회)의 용광로 속에서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 형성된 이 예식들은, 이 거룩한 선물을 받도록 준비된 신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전망을 구현해주고, 하느님 은총의 진정한 현존을 확증해주며, 구원과 성화를 전달해 줍니다.

정교회 밖에서 행해진 성사

원칙적으로 정교회는 정교회를 벗어나 행해진 ‘성사’에 똑같은 충만함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행위가 영적인 힘과 본질을 완전히 결여한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이들의 행동에 이코노미아(경륜)의 교리에 적용하여,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마르코 9:39)라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이해합니다. 다른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성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을 얼마나 충실히 지켜왔느냐 혹은 얼마나 왜곡시켰느냐에 따라 그만큼 변질됩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은 다소간의 차이를 가진 정교회의 주변적 구성원으로 여겨집니다. 성령의 역사하시는 중심은 역사적이며 가시적인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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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성사

그리스도인에게 세례성사는 최초의 본질적인 신비이고 절대적이며 결정적인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육화, 죽음, 부활의 혜택이 세례성사를 통해 신자들에게 전해집니다. 세례성사는 아담의 자손과 그 모방자들이 쌓아온 잘못된 행동,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왜곡된 형상을, 죄로 인하여 훼손된 하느님의 형상을 각자에게 새로이 각인시켜주고 전가시켜 줍니다.

세례조는 “사람이 죽고 동시에 태어나는” 무덤이고 자궁입니다. “구원의 물은 당신의 무덤이며 동시에 어머니입니다.”(St. Cyril of Jerusalem) 세례조의 물에 세 번 잠기고 나오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례는 죽음이며 새로운 탄생입니다. 물은 하나의 생명을 멸하고 다른 생명을 얻게 합니다. 옛사람을 쓰러뜨리고 새사람을 일으킵니다. 이 전례행위는 두 가지 현실을 표현합니다. 아담과의 연대되어 죄와 죽음에 종속된 옛사람의 죽음이 하나의 현실이요, 다가올 생명을 위해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새로운 지체와 능력을 구비한 새 사람의 탄생이 또 하나의 현실입니다.

되어감의 시작

세례성사에서 나이는 고려 조건이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부터 교회는 계속해서 성인과 아이 모두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경우 유아세례가 원칙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성사는 혼자 단절된 채 거행되는 것이 아니라, 성사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부모, 대부모, 특히 공동체 전체의 분명한 신앙고백 위에서 거행됩니다. 이렇게 모인 공동체는 매번 신앙을 되풀이 하여 고백하고, 나이와 처한 상황과 무관하게 그 구성원들에게 지속적인 그리스도교적 증언의 환경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세례는 끊임없는 되어감의 과정입니다. 마음의 돌이킴 혹은 끊임없는 회개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만들고 하느님 왕국을 향하게 하는 매일 매일의 체험입니다.

세례성사는 신자들을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분의 백성인 교회와 합일케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 받고 공동체 안에 들어가며, 삶 안에서 그 신앙의 가치와 신앙의 관점을 공유합니다. 세례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광 받으신 삶으로 데려가고 그분의 신화된 인성에 우리를 참여케 함으로써, 금욕의 실천과 기도의 삶과 성체성혈성사 안에서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매일매일 경험되는, 그분의 몸인 교회 안에 우리를 통합시킵니다.

유아 세례 전 예식들

정교회에는 유아를 위한 세례성사와 밀접하게 연결된 세 가지 예식이 있습니다. 첫째, 태어난 날에 어머니와 아이를 위한 예식이 있습니다. 이 예식으로 교회는 어머니의 순산과 새 생명의 탄생에 감사를 표합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강복하면서, 교회는 물과 성령을 통한 새로운 두 번째 탄생을(요한 3:5) 기대합니다. 둘째, 생후 8일째 행해지는 예식으로, 새로 태어난 아이는 부모로부터 이름을 받습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획득한 새로운 정체성의 표식으로 아이에게 그리스도교식 이름이 주어집니다. 셋째, 생후 40일째 행해지는 예식이 있습니다. 테오토코스 마리아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아들인 그리스도를 성전에 데려갔던 신약성경의 사건을 따라, 새로 태어난 아이를 교회로 데려옵니다. 이 날 어머니는 축복을 받고, 아이는 세례성사를 통해 교회의 삶으로 온전히 편입되기 전까지 교회의 주변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세례성사 예식

정교회의 세례성사는 크게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의 단일한 예식은 사실 독립적인 몇 개의 예식이 합쳐진 것입니다. 첫 번째 부분은 사실상 준비 단계입니다. 보통은 교리학습으로 불립니다. 여기에는 악령을 쫓는 기도, 사탄에 대한 포기 선언과 단죄, 그리스도를 받아들임, 니케아 신경 낭송, 세례성사로의 부르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이 진정한 세례성사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세례조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예식은 세례조의 물에 풍성한 영적 권능이 주어지길 간청하는 축성 기도, “기쁨의 기름” 축성기도와 예비자의 몸에 기름 바름 등 일련의 간청 기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비자에게, 기름 바름은 타락한 본성을 치유한다는 의미와 그리스도를 위한 투사가 된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집니다. 세례조 물 위에 기름을 붓는 것은 세례조 물에 거룩한 성령이 현존한다는 표식입니다.

이 예식들이 끝나면, 주교 혹은 사제는 “하느님의 종 (이름)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아멘.”라고 말하면서 예비자를 세 번 물속에 담궜다 빼면서 세례를 베풉니다. 세 번의 잠김은 그리스도의 3일간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새롭게 빛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재생, 새로움, 왕권, 미래의 불멸성을 상징하는 흰색 옷을 입습니다. 왕족의 색상인 흰색 옷은 세례의 은사를 상징하며, 세례자에게 세례 서약에 충실하고 온전히 머물겠다는 책임감을 상기시킵니다.

이 시점에 성유(myron) 예식, 즉 견진성사가 거행됩니다. 집전자는 “성령께서 주신 선물의 날인입니다.”라는 전례문을 읊으며 축성된 성유를 세례자에게 바릅니다. 성유를 십자가 모양으로 감각기관과 신체의 각 부분에 바르는데, 이는 성령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세례자를 타락한 본성의 회복을 넘어서는 곳으로 이끌어갑니다. 성령의 지속적인 현존은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끊임없고 점진적이고 인격적인 성장을 가능케 합니다. 그 다음에 세례자에게 십자가 목걸이가 주어집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세례성사 직후에 바로 성체성혈성사가 행해졌습니다. 새로 빛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성체성혈성사에 참여하기 위해 집전자와 함께 촛불을 들고 세례조에서 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성당의 신자석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고대 관습의 흔적이 세례 견진 예식의 마지막 순서에 남아 있습니다. 사제의 인도를 따라 세례자와 대부대모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례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도다. 알렐루이야.”(갈라디아 3:27)라고 세례 성가를 부르면서 세례조 주위를 세 번 돕니다. 그 다음 신약성경 봉독으로, 세례의 의미를 설명하는 로마서(6:3~11)와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라고 교회에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을 상기시키는 마태오복음(28:16~20)이 봉독됩니다. 그 다음 세례자는 거룩한 성체성혈을 영하게 됩니다.

“대(大)자비 연도”가 드려진 후에, 세례자는 부가적인 3개의 예식에 참여합니다. 이 예식들은 원래 세례를 받은 후 8일째 날에 행해지던 것이었으나, 현재에는 세례 견진 성사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집전자는 신비성사의 가시적 표식(기름 등)이 이제 삶의 본질과 내적 실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표시로서 세례자의 이마를 씻습니다. 이것은 세례자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과 삭발례를 통해서 강조됩니다. 머리에 안수함으로써 세례자,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길 바라는 이들은 그리스도인은 모든 적들과 싸우기 위해 성령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삭발례, 즉 머리카락 자르는 예식은 신체의 절단이나 학대를 요구하지 않는 희생의 봉헌과 순종의 표식입니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그 그릇된 가치들을 거부하고 신실한 헌신으로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의지와 결단을 선언합니다.

견진성사

견진성사는 예수님의 세례와 오순절 제자들에게 일어난 성령강림 사건,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는 주님의 선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사이에는 내적인 통일성과 구별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 두 성사는 신학적으로나 전례적으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견진성사는 두 번째 성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세례성사의 완성입니다. 세례성사가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로운 현존에 통합시키는 것이라면, 견진성사는 우리를 새 생명과 완전한 비추임의 원천이신 성령을 소유한 자로 만듭니다.

성령의 은사

견진성사는 신비스럽고 새롭고 숨겨진 생명이 우리 안에 넘치게 해줍니다. 이 성사는 성령의 은사와 에너지들을 사람에게 부어줍니다.(이사야 11:23, 갈라디아 5:22)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래에 대해 말하거나, 신비에 대해 가르치거나, 말 한마디로 사람을 질병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도록 성령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들 스스로가 더욱 덕스러워지고, 경건으로, 절제로, 혹은 사랑으로, 혹은 겸손으로 빛을 발하도록 성령이 주어집니다.”(성 니콜라스 까바질라스)

견진성사는 날인(sphragis)이라 불립니다. 세례자는 영원한 삶의 원천이요 약속이요 날인인 성령을 받습니다. 성유를 바름으로서 우리는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양과 군사임이 표시됩니다. 우리는 그분과 그분의 거룩한 교회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법상 견진성사는 단 한번 거행될 뿐 반복될 수 없습니다. 또한 견진성사는 화해의 성사입니다. 어떤 이단 교파나 분열된 교회를 떠나 정교회로 오는 사람들은 견진성사를 통해서 정교회에 받아들여집니다. 기름 바르는 예식은 “성령의 은사의 날인”을 통해서 교회법에 어긋나는 상황에서 행해진 그리스도교적 세례를 인정해주는 예식입니다.(존 메이엔도르프)

거룩한 성유

견진 성사의 기름 바름 예식에 사용되는 성유는 올리브기름, 발삼, 포도주와 약 40가지의 향기 나는 물질을 섞어 만듭니다. 그것은 성사적 은총의 충만함과 그리스도교적 삶의 달콤함, 그리고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상징합니다. 성유는 또한 거룩한 미론(Myron)이라 불립니다. 정기적으로 일 년에 한번 성대 목요일에 축성되는 성유는 성령의 예표요, 성령이 머무시는 가시적 장막입니다.

고대의 관습에 의하면, 성유를 축성하고 준비하는 권한은 주교에게 있고, 그것의 관리와 사용은 사제에게 위임됩니다. 정교회의 각 독립 교회는 성유를 축성하고 준비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교회의 수위 교구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은 관할하는 다른 교구에 거룩한 미론을 준비하여 나누어 줍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성체성혈성사)

감사의 성찬 예배 혹은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교회의 중심적인 신비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삶의 원천이자 정점입니다. 이 성사 안에서, 교회는 인간적인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령의 성전으로, 하느님의 백성으로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성 니콜라스 카바실라스에 따르면, 감사의 성찬 예배는 신비들 중에서도 가장 최종적이고 가장 위대한 신비입니다. “그 위로 넘어갈 수도 없고, 어떤 것도 그것에 덧붙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 다음에는 더 나아갈 곳이 없습니다. 거기서 모든 사람들은 일어서서 이 보물을 끝까지 지켜나갈 방법을 강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사에서 우리는 하느님 자신을 얻고, 하느님께서는 가장 완벽한 합일로 우리와 합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거룩한 신비들이 그 참여자를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만듭니다. 그러나 감사의 성찬 예배는 이것을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이뤄냅니다.

“당신의 은총을 베품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빵과 포도주라는 육신의 물질을 통해 모든 신자들에게 그분 자신을 퍼뜨리십니다. 당신과 신자들의 몸을 엮어, 이처럼 영원하신 분과의 합일로 사람들이 불멸을 나누어 갖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지키십니다.”(성 니콜라스 카바질라스)

지속되는 오순절

각각의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오순절 신비의 연속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교회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오심을 확증하고 갱신하는 것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찬 예배 안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어 당신을 기쁘게 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시고, 성령이 우리와 이 예물과 당신의 모든 백성 위에 내리게 하소서.”(예물 봉헌의 기도) 예배드리는 공동체는 성령을 품은 공동체가 되게 해달라고, 또한 축성된 봉헌물이 성령과의 친교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메시아적 연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강림 사이에 있는 현시대에서,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항상 메시아적 연회이고, 왕국의 음식이며, 천상의 것이 지상의 것과 만나고 섞이는 장소요 시간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인류와 자연과 시간으로 하여금 창조되지 않으신 성 삼위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성찬 예배는 단지 신성한 드라마나 과거의 재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감싸 안는 사랑의 참된 현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현존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묵시록 19:9) 모두를, 즉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교회에 들어와 그리스도와 성령을 품게 된 모든 사람들을 정화시키고 교화시키며 완벽하게 하고 신화시킵니다.

성찬예배에서 우리는 거룩한 역사의 이러 저러한 고립된 사건들을 기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창조에서 육화에 이르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의 신비 전체를, 특별히 “십자가, 무덤, 사흘만의 부활, 승천,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심,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념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예배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경험함으로써, 구원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느님 왕국의 신비요 오직 하나의 현실로서 경험됩니다.

하느님 본성의 참여자

감사의 성찬 예배는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 우리의 죄를 위해 고통 받으신 그분의 몸, 아버지께서 그 자비로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안티오키아의 성 이그나티오스) 감사의 성찬 예배에서 그리스도의 신화된 몸은 우리에게 제공되고, 우리는 혼합이나 분리됨 없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 그 몸에 결합합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이 행하십니다.

“생명의 빵이신 그분 자신은 그분을 먹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분 안에서 그를 변모시키고 동화시킵니다.”(성 니콜라스 카바질라스)

그러므로 영원이 우리의 유한을 꿰뚫습니다. 남자, 여자, 아이들은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도록 초대 받습니다.

“… (감사의 성찬 예배에서 그리스도의) 이 몸으로 우리의 공동체는 하늘로 오릅니다. 그곳은 참으로 이 빵이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순수한 제물로 인하여 지성소로 들어갑니다.“(성 그레고리오스 팔라마스)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고린토후서 13:13) 통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며 흘러넘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을 품은 사람(테오포로스)”이 됩니다.

지역 교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신비는 신성한 리뚜르기아에서 온전히 실현됩니다. 왜냐하면 감사의 성찬 예배는 그분의 인격적 현존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충만한 성사적 삶을 영위하는 모든 지역교회는 “공동체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의 기적으로서, 주님의 제단 위에 그리고 그 제단을 둘러싸고 지어집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거행되는 언제 어디서나, 지역 교회는 교리적 일치와 교회법적 규범의 표지를 지닙니다. 이렇게 하여 지역 교회는 하느님의 참된 교회의 표지, 즉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적인 표지를 지닙니다. 이 표지들은 결코 어떤 인간 집단에 속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공동체에 주어진 종말론적 표지입니다.”(존 메이엔도르프)

감사의 성찬 예배는 교회의 지체들을 그리스도와 또한 서로서로를 연합시킵니다. “왜냐하면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고린토전서 10:17)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고 거룩한 성령의 은사로 되살아난 교회는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 됩니다. “만약 이 연합이 진실로 그리스도와 그리고 서로 간에 맺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확실히 우리와 함께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자발적으로 하나된 것입니다.”(다마스커스의 성 요한)

“신성한 리뚜르기아(θεια Λειτουργια)”라는 용어의 의미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정교회가 감사의 성찬 예배를 거행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를 일컫는 이 명칭은 그리스 말로 ‘티아(θεια)’와 ‘리뚜르기아(Λειτουργια)’라는 2개의 그리스어 단어로 구성됩니다. ‘티아’는 “하느님에 관한”이라는 의미로, 신성하다는 뜻입니다. ‘리뚜르기아’라는 단어는 다시 2개의 단어 ‘리또스(λειτος, 사람들)’와 ‘에르곤(εργον, 일)’로 구성된 합성어로, “사람들의 일” 혹은 “공동의 일, 행동, 기능”을 뜻합니다. ‘리뚜르기아’라는 단어는 찬양의 행위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공통의 관심을 위해 행해지는 업무 혹은 행동을 묘사하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전자의 종교적 의미는 성경과 교회의 용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70인역 구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성전의 업무와 사제의 역할에 적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드물게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역(히브리인 8:6)과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사도행전 13:21)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사도시대 교부들과 이후의 전통에서 이 단어는 예배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4세기에 ‘리뚜르기아’라는 단어에 형용사 ‘티아’가 합쳐져 감사의 성찬 예배의 신비를 표현하는 전문 용어가 되었습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로 번역된 ‘에프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라는 단어는 ‘감사’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성찬예배 집전자가 낭송하는 봉헌 기도(아나포라Anaphora)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의 기원

성찬예배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첫 번째 부분은 “말씀의 전례, 혹은 세례예비자의 전례”라고 불리며, 두 번째 부분은 “감사의 성찬, 신비의 전례, 세례신자들의 전례”로 불립니다. 말씀의 전례는 기본적이고 고전적 형태로 볼 때 유대교 회당의 예배가 그리스도교화된 것입니다. 감사의 성찬은 주님께서 최후의 신비로운 만찬에서 행하신 말씀과 행동에서 유래했습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유대교 회당의 기도 예식 그리고 유대 가정의 친교의 식사 예식과 맺는 관련성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배경과 관련시켜 이해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사도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교회가 그 기원에 있어서 셈족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은 분명 그리스도교의 영원한 특징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똑같이 교회가 헬레니즘과 뿌리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 또한 명확합니다.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헬레니즘 세계에서 성장했습니다. 교회의 전례, 예술, 신학은 이 두 경험의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전례는, 특히 감사의 성찬 예배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가장 독창적인 창조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독창적이긴 하지만, 무에서 생겨난 창조물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자신에 대한 지독한 몰이해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에 불과합니다.”(루이 부이에)

감사의 성찬 예배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속 사역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시려고, 또 그분과 그분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는 친밀한 친교를 확립하시려고, 친히 성 목요일 만찬에서 제정하셨습니다. 빵과 포도주에 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은 교회의 가장 주요한 전례 예식인 감사의 성찬 예배의 기초를 형성합니다. 모든 성찬예배의 핵심은 다음 네 가지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빵과 포도주를 거룩한 제단에 봉헌하여 놓는 행위, 성령께서 오셔서 봉헌물을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시길 바라는 간청과 제정의 말씀이 포함된 감사의 대기도 혹은 봉헌기도 행위, 축성된 빵을 자르는 행위, 하느님의 백성들이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받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최초의 감사의 성찬예배는 아가페 혹은 사랑의 축제라고 불리던 공동체의 저녁 식사의 한 부분으로 거행되었습니다. 1세기 말 2세기 초에 감사의 성찬 예배는 공동체 식사에서 분리되어 아침 이른 시간으로 옮겨졌습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의 발전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조화, 미, 위엄, 그리고 신비감으로 특징되는 리드미컬한 움직임, 소리, 광경의 종합 행위입니다. 성찬예배는, 초기에는 좀 더 정교했으나 오늘날에는 한결 간결해진 두 번의 입당, 감사의 대기도(Anaphora), 거룩한 성체성혈을 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잘 짜여진 시작 예식(enarxis)과 폐식 예식(apolysis)이 이 모든 전례 행위를 감싸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입당 혹은 “소입당”은 교회로 성직자와 신도가 들어가는 것으로, 말씀의 전례의 시작을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소입당은 입당송을 부르며 복음경을 들고 걷는 장엄한 행렬입니다. 두 번째 입당 혹은 “대입당”은 감사의 성찬 예식의 시작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이것은 봉헌되고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들고 이동하는 장엄한 행렬입니다. 봉헌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은 사제가 준비합니다. 준비 예식(Proskomide)은 시작 예식(enarxis)에 앞서 예비 제단(Prothesis)에서 행해집니다. 빵과 성작을 준비하고 성인들을 기념한 후에, 집전자가 이름을 부르며 죽었거나 살아있는 신자들을 기념하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성찬예배의 말과 행동의 각 요소는 조화스럽게 어울린 하나의 기도를 구성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육신과 영혼을 고취시킵니다. 예식의 장엄함은, 우리가 드리는 지상의 예배가 하늘나라 예배의 기쁨과 장엄함을 반영해야만 한다는 개념에 그 원칙을 두고 있습니다. 감사의 성찬예배에서 우리는 찬양, 감사, 중보, 고백의 감명어린 기도와 성경 봉독, 설교, 또한 찬양송, 전례 성가, 시편 낭송, 신경 낭송 등을 듣습니다. 행동으로는 장엄한 행렬과 일련의 전례 행위들에 참여합니다. 집전자의 은총 가득한 몸짓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응시하는 주님과 성인들의 이콘들로 우리의 눈은 채워집니다. 향 내음은 코에 가득하고, 마음은 신성한 현존의 심오한 정적에 붙들립니다. 제물을 봉헌하기 전 “서로 서로 사랑합시다”라고 말할 때,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라고 말하며 서로 인사합니다. 하나된 목소리와 마음으로 신경을 낭송하고, 세례 받았을 때의 그 정교회 신앙으로 스스로를 되돌립니다. 거룩한 성체성혈을 영한 후, 신자들은 “주님의 어지심을 맛보고 깨닫습니다.”(시편 34:8)

신성한 리뚜르기아의 기본적인 윤곽은 신약성경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예식과 전례문은 점차적으로 발전했고, 성찬예배의 몇몇 요소는 여러 배경과 계기들을 통해 발전했습니다. 그 구조는 성가, 기도, 그리고 다양한 예식들로 확장, 확대, 장식되었습니다. 10세기에 이르러 동방의 으뜸가는 정교회 교구인 콘스탄티노플 관구에서 감사의 성찬 예배의 대강이 구체화되었습니다. 이후 발전, 수정, 개정의 과정은 비교적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예식은 그 명성 덕분에 동방 정교회의 모든 다른 예식에 영향을 주어 결국에는 이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12세기 말부터 지역의 관습을 반영한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모든 정교회의 유일한 보편적 예식이 되었습니다.

3개의 신성한 리뚜르기아

콘스탄티노플은 몇 개의 전례 전통을 섞은 거대한 용광로였습니다. 이 종합으로부터 3개의 구별되는 콘스탄티노플의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나왔습니다. 확고하게 하느님의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고 교부들의 경험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이 성찬예배들은 우리를 하느님의 영광과 자애의 심장부로 데려갑니다.

12세기까지 성 대(大) 바실리오스 성찬예배는 콘스탄티노플의 으뜸가는 성찬예배였습니다. 이 예배의 봉헌기도는 동방이든 서방이든 모든 성찬 예배 중에서 아마도 가장 감명적일 것입니다. 그 사고의 통일성, 신학적 깊이, 풍부한 성경적 형상은 강력하며, 모든 일요일과 대축일에 거행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에는 1년에 10번만 거행되는데, 바로 대사순절 기간 중 5번의 일요일, 부활대축일과 성탄대축일과 신현대축일의 전날 예배, 성 대 목요일, 그리고 1월 1일 성 대 바실리오스 축일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찬예배는 성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 보다 더 짧고 덜 수사적이며, 그 간결성과 명확성으로 구별됩니다. 처음에는 아마도 콘스탄티노플의 주중 성찬예배에 사용되었으나, 점차적으로 성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를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성 요한 크리소스톱 성찬예배는 성대 바실리오스 성찬예배와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가 거행되지 않는 모든 성찬예배에서 거행됩니다.

미리 축성된 성찬예배는 봉헌기도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온전한 성찬예배는 아닙니다. 이 성찬예배는 대사순절의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성대주간의 첫 3일에 거행됩니다. 여기에는 그 직전 주일(혹은 토요일) 성찬예배에서 축성된 거룩한 성체성혈을 제단으로 옮기는 만과와 다른 성찬예배처럼 성체성혈을 영하는 순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역 관습에 따라 3개의 다른 고대 성찬예배가 있으며, 전통적으로 그 성찬예배의 저자로 알려진 성인의 축일인 경우 정교회에서 사용됩니다. 성 야고보 성찬예배는 예루살렘의 고대 성찬예배이며, 성 마르코 성찬예배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자 성 그레고리오스 성찬 예배는 카파도키아와 알렉산드리아의 성찬예배였습니다.

성찬예배의 집전자

성찬예배는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이 참여하는 공동의 행위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사제와 신도의 참석과 능동적 참여를 전제하며, 이들 각각은 자신의 본질적이고 구별되는 임무, 역할, 기능이 있습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의 으뜸 집전자는 주교 혹은 사제이며, 이들 없이는 성찬 예배를 거행할 수 없습니다. 주교 혹은 사제는 한분이시며 진정하고 유일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동합니다.

거룩한 성체성혈을 영함

감사의 성찬 예배는 세례를 받고 사랑의 연대로 공통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고 공유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교회와의 온전한 친교 안에 있는 정교회 그리스도인만이 거룩한 선물인 성체성혈을 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례와 견진을 받은 모든 성인, 청소년, 유아들이 정기적으로 자주 성체성혈을 영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체성혈을 영하는 성인과 청소년은 전날 저녁부터 성체성혈을 영할 때까지 금식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합당한 자들만 그것을 영하기 위해 오십시오. ‘거룩한 은사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거룩하다고 부르는 사람들은 완벽한 자들이 아니라, 완전에 이른 사람들이 아니라 아직 그것을 얻지 못했지만 그것을 얻고자 갈망하며 싸우는 자들입니다. … 이것이 바로 만약 그리스도에게서 잘려나가 죽음에 이르게 할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면, 어떤 그리스도인도 거룩한 성찬 예배에 참여하여 성체성혈을 영하는 것을 금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거룩함을 갖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갖춘 덕의 결과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그분으로부터 그리고 또 그분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성 니콜라스 카바질라스)

고백성사

입문 성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적 삶의 가치를 따르기 위해, 붙잡고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삶의 긴 여정 안으로 들어서게 합니다. 세례성사로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 그들의 삶을 지배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은 가장 고귀한 행동에 수행하여 “신앙과 덕목을 굳게 붙잡고 그것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복된 삶으로 형성되어 갑니다.”(성 니콜라스 카바질라스) 교회는 결코 세례성사가 자동적으로 영원히 구원의 담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의 세례성사의 온전한 효력은 세례 받은 사람들이 끝까지 보물을 보존하고 지키려고 할 때 드러납니다. 우리의 훼손되고 상처받고 타락한 본성을 복원하고 치료하는 과정은 계속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오래 참으시며, 당신의 피조물을 끊임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회개하는 죄인을 부드러운 손길로 받아들이며 이들의 변화에 아주 기뻐하십니다. 그분의 자비와 용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성령에 반대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만 빼고, 모든 죄가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무력함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냉담한 마음에 직면합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 회개하는 넘어진 그리스도인들을 껴안으시고, 이들을 용서하시어 교회와 화해시키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려면, 죄인인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느님에 대한 불충의 자각, 통회하는 마음, 변화의 결단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 교회로부터 권한을 받은 사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만 합니다. 내적인 회개와 구체적인 죄를 입으로 고백하는 것, 이 둘 모두는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입니다. 고백성사는 자신의 양심을 하느님과 교회의 증인 앞에서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당신은 죄를 지었습니까? 성당에 가서 당신의 죄를 회개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곳에는 재판관이 아니라 의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취조당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누가 고백성사를 주재하는가?

주교 혹은 지정된 고백사제가 고백성사를 집전합니다. 고백성사는 일반적으로 성당에서 혹은 다른 어떤 편하고 적당한 장소에서 이루어집니다. 고백신자와 고백 사제는 서로 얼굴을 맞댑니다. 고백사제는 죄인의 같은 입장이 되어, 그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의 죄의 결과를 함께 짊어집니다. 통찰력 있는 의사가 상처를 치료하려 하듯이, 그는 죄를 치료합니다. 그는 조언을 해주고, 고백하는 자의 영적 건강의 보존을 위해 속죄행위(penance)의 처방들을 내려줍니다. 이 “속죄행위”는 벌이 아니라 치료제일 뿐이고, 성사의 본질적 부분이 아닙니다. 속죄행위에는 영적 독서, 금식, 더 많은 기도, 절기도, 자선행위, 특정기간 동안 성체성혈 참여 금지 등과 같은 것들을 포함합니다.

고백사제는 죄인이 아니라 죄에 대해 심판을 선고합니다. 영적 아버지로서, 죄인을 위해 기도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냅니다. 고백신자가 죄 고백을 마치면, 고백사제는 그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 머리에 손을 얹은 다음 죄 사함의 기도를 낭송합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용서가 선포되고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치료하는 분은 사람인 고백사제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백성사는 본질적으로 치료의 사목입니다. 우선적으로 죄는 처벌받아야 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치료받아야 하는 질병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악마의 책략에 말려들기 쉽기 때문에, 양심을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자기 인식을 깊게 하고 마음의 감수성을 되살려줍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들은 계속되는 영적 발전과 성장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삶을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고백사제를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신품성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한분의 참된 사제이십니다. 스스로 제물이 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하느님과 연합시키신, 새로운 계약의 유일한 대사제이며 중재자이십니다. 모든 신자들이 가지는 왕적 사제직과 사제들의 사제직, 이 둘 모두는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 그 원천을 두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기본적으로 주교, 사제, 보제로 구성되는 성직체계를 통해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신품 성사의 은총을 구별되어 세워집니다. 교회를 섬긴다 함은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고 가르치고 설교하고, 거룩한 성사들을 집전하며, 올바른 교리를 보전하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연합된 몸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성직체계는 주님께서 설립하신 교회의 본질과 구조에 속합니다. 사도들에게 한번 주어졌던 은사와 직무는 신품성사를 통해 사제직의 신비로 서품된 이들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직무와 의무

주교는 사도들의 계승자로, 최고의 목자이며 교회의 수장이고 참된 신앙의 수호자이자 교사입니다. 주교는 신품성사의 집전자이며 주관자입니다. 교회의 성직자를 선택할 권리는 모든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있지만, 성당을 축성하고 사제를 서품하고 임명하는 권한은 오직 주교에게만 있습니다. 평등한 협력 관계로서의 주교직의 표지로, 세 명의 주교가 (혹은 세 명의 동의 하에 적어도 두 명의 주교가) 주교를 서품합니다. 하지만 주교 서품 이외의 다른 모든 서품은 한명의 주교로 충분합니다. 6세기부터 주교는 수도 사제에서 선출되어 왔습니다. 사제와 보제는 결혼이 허용되어 있지만, 서품 전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결혼한 사람은 서품될 수 있지만, 사제와 보제는 결혼할 수 없습니다. 홀아비는 주교로 선출되고 서품될 수 있습니다.

사제는 주교직의 직무를 나누어 갖습니다. 이들은 지역 교구를 보살피고 사목하며,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치고 거룩한 성사를 집전합니다. 또한 주교구의 일에 대해 주교와 함께 협의체(counsel)을 구성합니다. 대부분의 교구 사제는 결혼하지만, 수도사제나 수도사가 지역 교회에 봉직한다고 해서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보제는 주교와 사제가 전례나 가르침의 의무를 실행할 때 이들의 보좌합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여성이 보제로 서품되기도 했지만, 이 관례는 12세기에 폐지되었습니다.

작은 성직

이 세 “주요” 성직 외에도, 몇 가지의 “작은” 성직이 있습니다. 부보제, 봉독자, 성가대, 복사가 그것입니다. 이런 작은 직분들의 서품은 지성소 바깥에서 공동 예배 중에 이루지나, 성찬예배 중에는 절대 행하지 않습니다. 주교의 착좌식, 명예의 수여식, 임직식 등도 성찬예배 중에는 행해지지 않습니다.

서품 예식

주요 성직의 서품은 성찬예배 중에 행해집니다. 주교는 성경 봉독과 봉헌기도(Anaphora) 전에 서품됩니다. 이것은 주교가 신앙의 주요 해설자이며 성사의 집전자임을 가리킵니다. 사제는 대입당 직후 봉헌기도 전에 서품됩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성사의 집전자이기 때문입니다. 보제는 봉헌물의 축성 후 성체성혈을 영하기 전에 서품됩니다. 그는 전례 예식을 보좌하고 감사의 성찬 예배를 돕기 때문입니다.

서품에는 교회 전체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모든 서품 예식에서 서품자와 그곳에 모인 성직자와 평신도들에게 집전 주교는 안티폰(Keleuson)으로 그들의 동의 여부를 묻습니다. 서품 후, 새로운 성직자는 자신의 직에 맞는 제의를 입고 모든 신자들이 “합당합니다.(axios)”라고 선언하는 가운데 자신의 새로운 직위에 세워집니다.

모든 서품 예식에서 최초의 표지는 기도문들과 주교가 손을 겹쳐 서품자의 머리에 얹는 것(안수례)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요 성직과 작은 성직의 서품 예식에서 구별되는 점입니다. 주요 성직의 안수례는 “히로또니아(cheirotonia, 손을 뻗다)”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반면에 작은 성직의 안수례는 “히로테시아(cheirothesia, 손을 얹다)”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사제직의 특성

교회를 섬기기 위해 부름 받고 서품된 이들을, 영어로는 “clergy” 그리스어로는 “κλερος”라고 하는데, 이 두 단어는 모두 뽑아 따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품의 특징은 지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품은 결코 반복되지 않습니다. 신앙을 버리거나 그 직을 박탈당하였다가 다시 교회에 받아들여진 경우에도, 다시 서품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남성만 사제직에 서품될 수 있다는 것은 정교회의 기본적인 입장입이다. 사제직은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고, 그의 사제직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서품된 사람은 그분의 형상입니다. 주교나 사제는 부재하시는 그리스도의 파견자 혹은 대리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 안에 현존하심을 드러내주는 이콘입니다.

성직자는 신품 성사로부터 그 자신의 내적이고 개인적인 거룩함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처럼, 아니 그들보다 더욱 고된 노력과 절박함을 가지고, 그것을 얻기 위해 싸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성직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을 체현하고 공동체에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본질들을 드러내주어야 합니다. 또한 성직자는 그의 양떼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의 증언을 통해서 성직자와 신자들 각각이 그리스도의 몸의 살아있는 지체로 되어가는 것을 돕습니다.

결혼성사

그리스도인의 결혼

정교회 신학은 항상 그리스도인의 결혼을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표현해 왔습니다. 결혼 안에서 인간의 사랑은, 성 바울로가 말한 그리스도와 신자들 간의 친밀한 결합(에페소 5)을 반영하는, “하느님 왕국의 투영”입니다.(존 메이엔도르프) 결혼 생활은 성령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특별한 소명입니다. 그리고 결혼성사에서 바로 이 은총이 부여됩니다.

오늘날 정교회 결혼성사는 약혼 예식과 왕관 예식,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예식에서 결혼하는 양 당자자의 자발적인 의지를 분명히 하면서 반지를 교환합니다. 두 번째 예식에서 양 당사자의 머리에 씌우는 “왕관”은 성령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이 왕관은 기쁨과 순교의 왕관입니다. 부부는 영원으로 합일했기에 여기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결혼은 각 당사자 간에 막대한 자기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둘 모두 “순교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에서는 상대방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결혼은 단지 아이를 낳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상호 간의 사랑은 지속적으로 표현되고 유지되고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번성하고 가득하라고 명하신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야 하는 것이지, 결혼의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확실히 아이는 결혼을 성 삼위 하느님의 진정한 형상으로 만드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가족을 “작은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이혼

결혼은 당사자 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결정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항상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혼이 파탄 났을 때, 정교회는 일반적으로 진정한 결혼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결합이 필수적인 영원한 특징들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공표합니다. 일부 지역교회의 관습에 침투해 있기는 합니다만, 정교회가 이혼을 허락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혼은 현실적으로 법적 혼인 계약의 파기를 인정하는 사회법적 문제입니다. 교회는 단지 진정한 결혼을 이루려는 시도가 실패했음을 인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역사적이고 교회법적인 발전의 과정들을 상세하게 분석하지 않겠지만, 오늘날 정교회는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진정한 결혼을 이루려는 시도를 세 번까지 허용합니다. 명백하게 네 번째 결혼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성직자의 경우 오직 한번만 허용되며, 이것도 서품받기 전이어야 합니다. 끝으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결혼할 때는, 예식 안에 참회의 요소와 특징이 강력하게 부각됩니다. 기도문은 좀 더 슬프고 전체 예식이 훨씬 더 가라앉은 분위기를 가집니다. 이런 방법으로 교회는 양 당사자와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한 번의 지속되는 결혼이 그리스도교의 규범임을 상기시킵니다.

성유성사

“여러분 가운데 앓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도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야고보 5:14~15)

성 야고보는 성유성사의 사도적 토대를 제시하면서, 병자에 대한 기름 바름을, 좀 더 정확하게는 “기도의 기름”을 묘사합니다. 성경의 명령을 지키면서, 정교회는 한 무리의 사제들이 함께 이 성사를 거행토록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으로 중요할 뿐입니다. 또 이 성사는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죽음에 임박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치료뿐만이 아니라 죄의 용서도 이 성사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리고 오직 임박한 죽음의 경우에만 죽음을 준비하는 성사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정교회 신학은 항상 육신과 영혼의 연합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선명한 이분법이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확실히, 성유성사에서 사용되는 기도와 봉독은 육신의 치료가 회개를 보증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기름 바름은 영적 질병의 육체적 결과인 질병과 죽음 앞에서 궁극적인 용서를 상징합니다. 성유성사는 단순한 행위로서는 속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몇몇 경우에는, 속죄를 대체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정교회 성당에서 성대 수요일에 거행되는 대중적인 성유성사 예식은 부활대축일 감사의 성찬 예배를 준비하는 신자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계기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기름 바름은 진정한 회개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