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말로 ‘복음’이라는 단어는 ‘에방겔리온’인데,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정통 그리스도 교회의 좋은 소식은 인간 존재의 참된 운명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인류를 향하신 하느님의 무한하고도 희생적인 사랑의 선언입니다. 복음의 기쁜 메시지를 반영하여, 4세기의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좋은 소식은 사람이 더 이상 하느님 왕국에서 버림받지도 쫓겨나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시 아들이 되고,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교회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나누고자 하시는 최고의 보물은 바로 그 자신의 생명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선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 왕국의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서 행동하셨다는 확신과 함께 시작합니다. 이 신념은 신성한 리뚜르기아의 기도문에 아주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시고, 우리에게 다가올 왕국을 선사해주시기까지 당신은 멈추지 않으시고 모든 일을 하셨나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주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 완벽하게 표현되고 구현됩니다. 하느님 아들의 육화의 목적 전체가 인류를 하느님과의 친교 안으로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정교회의 위대한 스승들과 교부들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게 하시려고 우리와 같아지셨다고 선언함으로써 끊임없이 이 신념을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빛 우리의 생명으로 찬양되십니다. 그분의 인격 안에는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 있고, 우리 각자는 바로 그 연합을 나눠갖도록 부름받습니다. 그분의 삶의 방식 안에는 우리가 따르도록 초대받는 참된 인간 삶의 모델이 있습니다. 그분의 승리의 부활 안에는, 우리를 하느님 왕국에서 분리시키는 모든 권세들로부터의 해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를 다시 소유하게 되셨고, 우리를 그분의 아들 딸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신화 : 테오시스

각 사람 그리고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소명과 목적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그 생명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한 하느님의 강림은 성령의 활동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께로의 인간의 상승을 가능케 했습니다. 정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신화 즉 테오시스로 알려진 하느님을 향한 운동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신화는 각 사람이 더욱 완전해져가고 더욱 거룩해져가고 더욱 하느님과 연합되어 가는 영적 여정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정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나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신화는, 세례 성사를 받으면서 시작되고 저승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이승에서 삶 전체를 통해서 계속되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운동입니다. 구원은 죄와 죽음과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구속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소유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정교회에서 구원과 구속은 신화의 과정 안에 있습니다. 성 사도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편지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는 자”(2 베드로 1:4)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삶에 대한 이 풍요로운 관점을 잘 표현했습니다. 성 대 바실리오스 또한 인간은 신이 되라는 명령을 받은 피조물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소명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말들은 분명 대담한 주장들이고 그래서 바르게 이해되어야만 합니다. 정교회는 신화를, 언제나 감춰져 있고 알려지지 않는 하느님 본성과의 연합이 아니라 하느님의 에너지들과의 연합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경험은 이것이 하느님과의 참된 연합임을 또한 증명합니다. 그것은 또한 범신론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연합 안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그 고유한 속성들을 보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교회는 인간의 삶은 오직 신적인 것이 될 때만 그 충만한 성취에 도달한다고 믿습니다.

 

성령

각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맺는 이 지극한 연합은 마술적이거나 자동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토록 죄와 죽음과 악의 권세들을 멸하셨지만, 이 승리는 또한 각 사람이 성령과의 협력을 통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교 안에서 인간의 삶의 충만함을 실현함에 있어서 생명을 주시고 자유롭게 하시는 성령과 연합하고 협력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 안에 결합시키는 사역을 수행하시는 신화의 매개자이십니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나 우리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시고 우리 각자가 창조되면서 부여받은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을 완전케 함에 있어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협력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신화로 알고 있는 것, 즉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정교 그리스도인에게 교회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이 만나는 장입니다. 성령과 교회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2세기 성 이레네오스는 “교회가 있는 곳에 성령께서 계시고, 성령께서 계신 곳에 교회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이 진리를 일깨워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공통된 인성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연합시켜주시기 위해 교회의 삶을 통해 활동하십니다. 우리는 감사의 성찬 예배를 거행하고 성체성혈을 받아 모심으로써, 또 성사들에 참여함으로써, 매일 매일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금식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안에서 결과되는 모든 것들을 통해서 성령을 얻습니다.

주님이시며 생명의 수여자로 흠숭 받으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완전으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책임 있고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교회의 삶 안에 드러나십니다. 예배의 열매는 성령의 선물들입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 사도 바울로는 이 선물들을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갈라디아 5:22-23)라고 말합니다. 분명 이 선물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의 덕들입니다. 이 선물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개인과 교회

신화의 현실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길 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관점을 표현합니다. 정교회는 각 사람이 각자 하느님과의 유일한 관계들을 맺을 수 있게 해주는 천부적인 자격과 중요성을 가진다고 믿습니다. 인간 존재는 결코 완전히 타락해버린 존재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파괴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제거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 형상의 충만한 성취 기회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성사들은 거행될 때마다 각 개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거행됩니다. 이러한 전례 행위는 우리에게 각 사람의 존귀함을 상기시켜 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짊어지고 있는 책임을 또한 강조합니다.

정교회는 인간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홀로 있도록 혹은 자족하도록 지어졌다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각 사람은 교회의 중요한 지체가 되도록 부름 받습니다. 정교회는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고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신화의 과정은 믿음의 공동체라는 맥락 안에서 전개됩니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유일한 개성이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비인격적 힘이나 권능에 흡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되고 가치 있는 사랑이 다 그렇듯이,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또한 우리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합니다. 그분의 사랑은 파괴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참된 자아를 드러내고 고양시키고 완전케 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생명 안에 들어감을 통해서 우리는 본래 의도된 바의 인격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