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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시오스 조성암 한국의 대주교 2017년 NCCK 총회 설교말씀

 

2017년 11월 20일 NCCK 총회 때 암브로시오스 조성암 대주교께서 아래와 같은 설교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로마서 15:1~7)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타깝게도 모든 시대마다 세상의 강한 사람들에게 억압당하고 사는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감정적으로 약한 사람들이 있었고, 또 지금도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적 소수자라고 부르는 우리의 형제들인 이 약자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부러진 갈대와 같은 것으로서, 우리가 더 잘라서 더 많은 조각이 나게 하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깜박거리는 심지와 같은 것으로서, 꺼버리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이사야 42:3, 마태오 12:20참조)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복음과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사회적 소수자인 우리 형제들을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지탱해 주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중에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고린토I 9:22)라고 하시는, 이방인들에게 위대한 사도되신 바울로께서 이러한 의무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충고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로,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신 15장 1절~7절을 보면 먼저 사도 바울로는 우리들에게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말씀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오늘날 세상에는 그토록 많은 불행이나 불평등, 또한 그토록 많은 비 신자들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현실은 사도 바울로께서 말씀한 내용과 반대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말인데,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나는 힘이 있으니 약한 자를 밟고 일어서는 것이 정당하다.”라는 정글의 법칙을 따르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말고”라는 말씀에서, 강한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세상적인 생각에 따르면 강한 사람이란 거칠고 완강한 힘으로 육체나 물질이나 영혼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로에 따르면, 강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강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나약함을 부담하고 인내하셨듯이,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약한 모습을 향해 당신 자신을 낮추시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나약함을 측은하게 여기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본보기로 삼아 말하자면 강한 사람이란, 인내하고, 참고, 용서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약점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강한 사람이란, 약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약점 때문에 제기하는 이상하고 비이성적인 요구들에 대해서도 “연민을 가진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위대한 성서 주석가인 4세기의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라는 것은 그냥 은혜를 베푼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우리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 빚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돌보아 주어야 하느냐 하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강한 사람들에게만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강한 사람으로 여기며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말하셨습니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약한 사람에게 겸손함을 보여준다고 해서 당신은 당연히 잃는 것이 없고, 전혀 해도 입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돌보아 주지 않으면 약한 사람은 더 나쁜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니,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갈라디아 6:1)라고 갈라디아서에 언급되어 있듯이, 강한 사람들을 자비로 이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로는 ‘약한 사람들’이 아닌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라고 말하였습니다. 혹시 당신은 강한 사람입니까? 당신이 강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십시오. 이 감사는 당신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었을 때 하느님께 전달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약한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강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뿐만 아니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 남을 비방하는 사람, 또 다른 단점이 있는 사람, 여러 가지 약점이 있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십시오.”(로마서에 대한 견해서, 설교 28, PG 60:646)

요한 크리소스톰 성인이 하신 이 매우 훌륭한 해석을 통해 보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하는 의무를 행하는 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즉,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으로 무장한 영적으로 강한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땅히 희생물로 제공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물로까지 바치신 그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베풀어졌던 것처럼 그렇게 사랑은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위에 있고, 더 거룩하고,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더 아래 있는 사람들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없고, 약점을 돌보아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고,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사랑이 자리하는 귀중한 기반입니다. 물론 우리는 매우 주의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힘의 느낌 안에는 사탄적 이기심이 감추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오히려 결국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적으로 보살핌을 받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고 있고, 우리는 그가 성령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힘과 강함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사도가 그려낸 그리스도에 대한 아름다운 표현에는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29)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들의 죄를, 우리들의 약점을, 우리들의 무거운 짐들을 가득 채우고 짊어지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각자에 대해서, 그리고 온 인류에게, 모든 우리 개인들에게 개별적으로, 그리스도는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키레네 사람 시몬(키리내오스)이십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그래서 어느 누구도 판단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들의 죄는 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 현미경을 들이대고 미세한 것을 이기적인 입장에서 비판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 실재이든, 소문이든, 알게 되면 사악한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참견하고,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본보기와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반대되는 지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고, 빛을 받은 사람이고, 높은 사람입니까? 당신이 훌륭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고 그 약점을 견뎌낸다면, 그래서 그들 곁에 함께 서 있을 수 있다면, 냉혹한 판사나 비윤리적인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과 이해심이 가득한 조력자로서, 영성과 거룩함을 보여줄 것입니다.

 

  1. 두 번째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면서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 “좋으실 대로 하시지 않고”. 즉, 우리들이 원하는 바대로 하지 마십시오. 약한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의견이나 제안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거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거하거나 분쇄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마음에 들도록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좋으실 대로 하시지 않고”. 자기만족에 빠지고, 자기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매우 심각한 병폐입니다.

 

  1. 세 번째로, 사도 바울로는, 우리들에게 하신 “우리는 저마다 이웃의 뜻을 존중하고 그의 이익을 도모하여 믿음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라는 말씀에서 우리들 행동의 최종 목표가 어디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 “당신은 강한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약한 사람이 당신의 능력을 알게 하고, 당신의 능력을 배우게 하고, 당신을 좋아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리고 또 사도 바울로는 그냥 ‘좋아할 수 있게’ 하라고 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게 하라고 하였고, 그냥 ‘좋아할 수 있게’ 하라고 한 것 이상으로 ‘믿음을 북돋아 주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부자든 권력자든, 당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래야 당신은 진정한 영광을 맛보고, 많은 유익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영광은 사라지지만, 당신이 만약 그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믿음을 북돋아 준다면 영적인 영광이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로는 ‘누구, 누구’를 지목해서 말하지 않고, 여러분 개개인이 그렇게 행하길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로마서에 대한 견해서, 설교 28, PG 60:646)

이 부분에서 저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닌 ‘사람 마음에 드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큰 병폐에 대해 언급하려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한다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진 죄의 욕구를 좇아가도록 방관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를 구원의 길이 아닌 파괴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이렇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갈라디아 1:10)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행하는 모든 죄의 행위를 긍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인도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노력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당사자가 해를 입게 되어도, 그가 어떤 유익함을 잃어버리게 되어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다 용서하는 것은 병든 사랑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행동은 궁극적으로 선함, 덕,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상적이고 완전한 교회와, 그리고 세상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이웃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1. 네 번째로, 사도 바울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항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의 편지를 읽는 독자들이 다른 사람의 약한 점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들의 완전함을 제쳐두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이 좋으실 대로 하시지 않고”라고 다시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좋으실 대로 하시지 않고”라고 한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분은 당신 자신이 다치지 않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요? 당신 자신이 받은 고난을 받지 않도록 할 수는 없었을까요? 물론 당신 자신을 위해서 원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업신여기셨습니다.

 

  1. 다섯 번째로,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강한 사람이건 약한 사람이건 예외 없이 모두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안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마지막에 강한 어조로 권고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여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누구도 판단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양떼로, 당신의 가족으로, 아버지의 아들로, 당신의 사랑하는 신부로 받아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크나큰 관대함을 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보잘 것 없는 사람들”(마태오 25:45)에게 관대해지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정의로운 사람들이라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원수였음에도 우리를 자신 편으로 안아주셨습니다.(로마서 5:10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주신 것처럼 우리 각자도 다른 사람을 받아들여서 주님을 영광되게 합시다. 이렇게 우리의 실천으로 주님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최종 목표가 되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 어떤 다른 행동보다도 주님을 영광되게 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단 하나만은 제외합니다. 죄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죄도 예외가 아닙니다. 죄는 제외하고, 세상을 사랑합시다. 세속적인 사람은 되지 말고, 세상을 사랑합시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사랑합시다. 세상을 사랑하며, “주님께 영광을 바치며”,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로 모든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아멘.

 

✝암브로시오스 조성암 대주교